본문 바로가기
글자 굵게글자 크게글자 작게인쇄

경북을 빛낸 인물

no image

태두남

활동시기
조선시대

상세설명

조선 중종 때의 문관으로 자는 망이 호는 서암 본관은 영순이며 발해왕 대조영의 후예이다. 1513년(중종 8년) 생원·진사에 모두 합격하고 같은 해 식년문과 을과에 급제하고 형조 좌랑을 비롯하여 사헌부 집의를 지냈으며 1536년(중종 31년) 종부시정이 되어 춘추관 편수관을 겸했으나 김 안로의 미움을 사서 성주 목사로 좌천 되었다가 재직 중에 작고했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기재가 있었으므로 1504년(연산 10년) 연산군이 폐모 윤씨의 능묘의 호를 추존하려 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예천에 귀양왔던 허백당 김 양진이 공을 사랑하여 집에 데려다가 양육하면서 가르쳤으니 공은 도의를 숭상하고 시문에 능했으며 글씨를 또한 잘 썼다.

천성이 강직하여 김 안로가 권세를 잡으매 그 문하에 출입을 끊었고 안로가 공의 은사 김양진을 시기하여 바야흐로 해치려던 차 1535년(중종 30년)에 김공이 작고하자 사람들이 두려워 감히 상을 돌보지 못하였으나 공은 떳떳이 나아가 마음을 다하여 은사를 치상하였다. 이로인하여 안로에게 미움을 받고 몰려 성주 목사에 좌천되었다가 재임 중 작고하고 예천 보문면 옥천서원에 모셨다.

저서에 쇄언 2권이 있고 당시의 명사 회재 이 언적·충재 권 발 등과 양정회를 조직하고 도의로 사귀면서 시문을 창수했다. 개령 현감으로 나가 향교를 고쳐 세워 학풍을 쇄신하고 남원· 상주· 선산의 원이 되었을 때 모두 맑은 정사를 베풀어 고을마다 송덕비가 세워졌다.

참고 문헌 : 영순태씨 족보, 한국인명사전

OPEN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3유형 : 출처표시필요,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금지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 제3유형(출처표시 + 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담당부서 :
경상북도청
담당자
행복콜센터
연락처 :
1522-0120
최종수정일
2021-04-05
페이지 만족도 및 의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