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자 굵게글자 크게글자 작게인쇄

경북을 빛낸 인물

no image

홍언충

직경/우암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부계
출생시기
1473년(성종 4년)
시대

상세설명

본관은 부계(缶溪)이고 자는 직경(直卿)이며 호는 우암(寓庵)으로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문광공(文匡公) 귀달(貴達)의 아들로 1473년(성종 4년)에 태어났다. 1495년(연산군 1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임명을 받았고 1498년(연산군 4년)에는 질정관(質正官)으로서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다녀 왔으며 예조정랑(禮曹正郞)에까지 이르러 1504년(연산군 10년)에 금궁(禁宮)의 일을 간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해도(海島)로 귀양갔다. 처음 유배되어 있을 때 집안 사람들이 도망가기를 권하였으나 임금의 명령인데 어찌 도망을 갈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듣지 않았고 압송 도중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물러났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

이때 그는 또 친형 및 이용제(李容齊)등과 같이 거제(巨濟)에 유배되었는데 하루는 섬 가운데 사약이 내린다는 풍설로 모두들 피난하며 어찌 할 바를 몰라 했으나 그의 형제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태연자약 하였다. 중종반정으로 소환되어 중종(中宗)이 자주 불러 관직에 나올 것을 권유받았으나 한 신하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여 절개를 굽히지 않고 시(詩)와 술로 즐기다가 1508년(중종 3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이때 그의 나이 36세에 불과했다.

그는 성품이 관대하여 사소한 예절에 얽매이지 않는 넓은 도량과 20세 미만의 약관에 학문이 크게 진보하여 문장이 넓고 맑으며 또한 예서(隸書)를 잘 쓰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일찍이 대령(大寧)의 정순부(鄭淳夫) 덕수(德水)에 이택지(李澤之), 고양(高陽)에 박중설(朴仲說)과 서로 벗하였으므로 이때에 사람들은 홍언충을 이들과 함께 사걸(四傑)이라 일컬었으며, 귀양에 풀려나서는 학문을 전폐하고 산수를 즐기며, 돌아다니며 사귀는 사람 또한 모두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 이었다.

그는 죽은 뒤 본손(本孫)이 없었으므로 지방 유림에서 묘소 앞에 청산제(淸山齊)를 세우고 제사를 올리고 또 근암서원(近岩書院)(현재 문경군 산북면 서중리 소재)에 봉안하였다. 저서로는 시문(詩文)과 자만사(自挽辭)가 있다.

OPEN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3유형 : 출처표시필요,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금지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 제3유형(출처표시 + 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담당부서 :
경상북도청
담당자
행복콜센터
연락처 :
1522-0120
최종수정일
2021-04-05
페이지 만족도 및 의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