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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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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여일(黃汝一)

해월헌(海月軒)·매월헌(梅月軒)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평해(平海)
출생시기
556(명종 11)
출생지
556(명종 11)
시대
조선시대

상세설명

조선시대 문신인 해월 황여일은 1556년 10월 21일 기성면 사동리에서 태어났으며 휘는 여일, 자는 회원 호는 해월이라 하였다. 1569년에 간성에서 진사시험이 있어 가는 길에 삼척 죽서루에 올라 시 한수를 읊었는데 당시 삼척 부사 양사언이 감탄 하였으며 이 시험에 장원급제하였다. 1585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춘추관 기사관, 승문원 부정, 회룡 전사관을 거친 후 선조대왕의 어명으로 호당(왕립도서관)에서 근무 하였다.

1589년 입시야강(임금님의 개인교수)에 임하였고 1590년 10월에 정은신과 이일 및 신립 장군과 함께 선조의 왕명에 의해 궁중의 선정전에서 국방에 관하여 논의하게 되었다. 1592년 4월에 함경도 고산 찰방에 임명된 며칠뒤에 임진왜란(1592년 4월 13일)이 일어나 부임하자 곧 함경감사에게 왜병과의 임전계획을 협의하였으나 유영입이 말을 듣지 아니하여 결국 함흥이 함락되니 세상은 무법천지가 되고 말았다.

이때 선생은 개유문을 써서 방을 부치고 치안 유지에 힘썼다. 그 후 조정에서는 윤탁연을 함경감사로 임명하고 해월은 종사관이 되었다. 종사관으로서 군병모집, 군량미 조달 등 선무공작을 하던중 회령의 관속 국경인이 반역하여 많은 관군을 죽이고 두 왕자와 신하들을 사로잡다. 적장 가등청정에게 투항하니 선생도 같이 포로가 되었다가 그 해 7월에 두 왕자와 함께 석방되었다. 석방 즉시 삼수사 윤경로와 의논하여 왜적을 물리칠 계획을 수립하던 중 함훙의 토호 진대유 부자가 왜적에 투항하고 그 앞잡이가 되어 백성을 괴롭힘에 잡아다가 죽이고, 그 해 10월에 윤경로와 함께 함흥을 공략하여 주야 3일동안 악전 고투 끝에 왜적을 50리 밖으로 물리쳤다.

1593년 그 공으로 형조정랑에 특진되었다. 이때 영의정 유성룡이 명장 이여송에게 명군의 횡포가 심하므로 이를 금해줄 것을 건의하다가 봉변만 당하고 돌아온 후 해월을 강산 금단관에 임명하고 해월에게 지시하기를 공은 의주에 가서 명군과 작당하여 백성을 괴롭힌 소통사를 샅샅이 조사하여 목베이도록 하니 그는 소임을 다하여 이의 폐단을 없앴다.

이 해 8월 선조대왕을 모시고 환도한 후 명장 이전종을 찾아가 화전법을 배워 유성룡에게 보고하여 그 보급에 힘썼다. 1594년 9월에 도원수 권율 장군의 종사관으로 행주대첩에 절대적인 공을 세워 임란사를 빛나게 하였으므로 국가 2등공신이 되었고 1595년 4월에 권율 장군을 따라 진주싸움에 참전 하여 또한 큰 공을 세웠으며 이순신 장군과 여러차례 만나 국사를 의논하고 작전을 협의하 였다. 1598년 명나라에 비변사(정사 이항복, 부사 이정구.서장관.황여일)로 갔을 때에 이태리사람 [마테오리치]의 감수를 받아 손수 제작한 세계지도는 현재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동양 유일품이다. 그 후 조천록을 지었으며 1623년 4월 2일 67세 로 영민하시니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 경연의 금부, 성균관사,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세자좌 부빈객 등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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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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