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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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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맹손

효백/송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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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경북 예천군 용문면에서 예천 권씨 득성 시조 섬의 증손으로 태어나니 자를 효백 호를 송당이라 하며 시호는 제평이다. 19살로 1408년(태종 8년) 식년 문과에 1427년(세종 9년) 문과 중시에 각각 을고로 급제하고 여러 차례 명나라에 사신하여 국위를 선양했고 1432년(세종 14년) 공이 좌부대언 일 때 상감이 박 연이 상소한 "문무 무무는 마땅히 당세의 일을 노래해야 한다"는 내용을 들어 "태조와 태종의 문무를 들어 노래 지으라"함에 악장문학인 문덕곡과 무공곡을 짓는데 깊이 간여했으며 다음 해 1433년(세종 15년) 3월에 다시 상감이 공에게 수명명 몽금척을 악장에 오리라 했다.

이리하여 고은악부 제정에 크게 공헌했다. 이것이 뒷날에 용비어천가가 창제된 바탕을 이루는 작업이기도 했으며 그 때의 초고본이 8·15 전후까지 후손에게 보존되었었는데 지금은 어느 대학도서관 소장이 되었을 듯하다. 공은 공정하고 청렴했다. 출사하여 검열 공조판서 이조판서 대제학 그리고 함길도 등 네 곳의 관찰사를 역임하고 아홉 차례나 중시관을 겪었으되 언제나 칭송이 높았다.

1450년(문종 1년) 이조판서로 있을 때 의창 제도의 모순과 관리들의 부정을 지적하고 이의 개혁을 상소했다. 의창(義倉)이란 평시에 곡식을 저장해 두었다가 흉년에 빈민을 구제하던 국가적 차원의 구호 기관으로 삼국시대부터 있어 왔고 뒷날 사창으로 바뀌었다. 조선 건국 초부터 관곡으로써 의창의 양곡을 보충하면서 1417년(태종 17년)에는 그 총량이 415만섬에 이르렀으나 백성의 낭비와 관리의 소홀로 점차 재고량이 줄어서 세종 때에는 세금을 양곡으로 걷우는 등 대책을 세웠으나 관리들이 아전이나 지방 부호들과 결탁하여 사리사욕을 취하여 의창의 곡식은 거의 바닥이 나고 문서만 남게 된 것을 시정하고자 하는 글을 올렸었다. 그리하여 이 의창 제도를 개혁했다. 그 후 중추원 부사가 되었으면 인산서원에 모신다.

참고문헌 : 세종, 문종, 세조실록, 연려실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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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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