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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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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산해

덕보/죽림거사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안동
출생시기
출생지
지보면 대죽
시대

상세설명

자는 덕보(德甫)요 호를 죽림거사(竹林居士)라 하며 본관은 안동, 의금부 경력관(寬)의 아들로 칠 형제 중 맏이이며 용궁현 대죽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종조부 좌의정 진(軫)의 문하에서 공부하더니 하루는 사기(史記) 백이전을 읽다가 책을 덮으며 탄식하여 「 이런 사람이 있은 다음이라야 나라의 기강과 사회의 질서가 잡힐 것인즉 어찌 일찍 수양산에서 죽었는고 」하며 눈물을 흘려 어려서부터 충의의 지조를 보였다.

1440년(세종 12년) 창덕궁 록사 및 주부에 천거되었으나 공은「내가 지금 벼슬을 하면 남들이 처가의 힘을 입어 벼슬을 하다(공은 현덕왕후 문종왕비의 이모부)할 것이다」하며 사양하고 성 삼문 박 팽년 등과 도의로 사귀며 1454년(단종 2년)에 처음으로 종부시 청정이 되었다. 이 때「내 선왕의 고명유신으로 어린 왕을 돕고자 부임한다」하더니 다음 해 단종이 손위 하자 벼슬을 버리고 집에 돌아와 주야로 띠자리에 꿇어 낮아 눈물을 흘리며 어린 임금의 안부를 거절했다.

세조가 찰방을 제수하니 병들었다 핑계하고 나아가지 아니했으며 다음 해 1456년(세조 2년) 성삼문 등 사육신과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자 고향에 돌아와 은거중 성삼문 등 사육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내 살아서 종묘 사직을 구하지 못할 바에야 살아서 무엇하겠는가」하며 통곡하고 조복을 갖추고 지붕 위에 올라가 북향하여 절한 뒤, 떨어져서 자결했다.

범속한 사람이라면 그 누가 목숨이 아깝지 아니하며 부귀영화가 부럽지 아니하랴만은 공에게 있어서는 명절이 태산보다 높고 무거우며 사생은 홍모요, 부귀와 영화는 뜬구름으로 여겨졌으니 진실로 거룩한 지조를 후세인이 본받음직 아니하냐 ! 당시 형편으로 보아 멸문(滅門)의 화가 눈앞에 닥친지라 부인이 집과 서적등 가장집물을 불사르고 장사지낸 뒤 숨어버리고자 했더니 세조는 죽은 의인에게서 관직을 삭탈하고 자손에게 금고백년(禁錮百年: 곧 자손에게까지 주어지는 형벌로 백년간을 벼슬길에 나서지 못하게 함)을 내렸다. 고의 아우 수해가 형수와 어린 네 조카를 앞세우고 멀리 영해로 피난하여 자손의 목숨을 보전되었으나 고단한 충신의 후예가 겪는 고초는 상상을 초월했으리라.

그 후 100년이 흘러 1558년(명종 13년)년 금고는 풀렸으나 공은 신원되지 못했다가 1625년(인조 3년) 순절한지 127년만에 곽 진이 공의 충절 사실과 자손의 해고(解錮:금고가 풀림) 사실을 조양에 알리는 광지(壙誌)를 썼다. 1789년(정조 13년)에 비로소 신원되어 종부시 첨정으로 복직되었고 1791년(정조 15년) 정조가 수원을 거쳐 영월 장릉(단종능)으로 거동할 때 경기 충청 경상 삼도 유생 이천여 명이 그 길목에서 상언청(上言請)하여 정려됐으니 정충각이 지보면 대죽리에 세워졌다가 그 뒤 1962년(철종 13년) 현 위치인 지보면 신풍리 염송산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른다.

참고문헌 : 장릉지, 운곡서원 상량문, 안동 권씨좌 유파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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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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