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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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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지의

의중/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곽지의 선생의 휘는 지의(之義)이요 자는 의중(義仲)이며 본관은 현풍이다. 선생의 장질인 곽익(郭익)선생은 자가 군정(君靜)이요 조선 명종(明宗)때 생원에 급제하고 1552년(명종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울산부사(蔚山府使)를 지냈으며 조남명(曺南溟)선생의 문인이다. 선생의 차질인 곽율(郭율)선생의 자는 태정(泰靜)이요,호는 예곡(禮谷)이며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선생은 어릴때 부터 총명하고 자질이 뛰어나 스스로 외전을 탐구하여 경전(經傳)을 송습하니 연일당 곽 지운(燕日堂 곽지운)선생이 장래에 큰 그릇이 될것을 알고 깊이 해설을 붙여 소학(小學)을 읽게 하였다.

판서 정사중(判書 鄭思中)이 한눈에 감탄하여 질서(姪서)를 삼았으며 1558년(명종 13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남명 조식(南溟 曺植)선생을 진배하고 또 조남명(曺南溟)선생의 고제인 한강 정구(寒岡 鄭逑)선생에 종유하며 질의하고 낙천 배신(洛川 裵紳), 오계 김부륜(梧溪 金富倫) 동강 김우옹(東岡 金宇옹)선생 등과 좋은 벗이었고 대암 박성(大庵 朴성), 존재 곽 준(存재 郭준)선생과는 마음으로 맺어진 동지로서 성망이 높았다.

1572년(선조 5년)에 관천으로서 벼슬에 올라 조지별제(造紙別提)를 지냈고 1573년(선조 6년)에 김천찰방 내첨시 직장(內瞻시 直長), 송라찰방 등을 역임하며 많은 치적이 있었다. 1586년(선조 19년)에 선생의 학행이 탁이하므로써 특채로 사포서 사포(司圃署 司圃), 홍산현감(鴻山縣監)이 되어 지성으로써 백성들을 다스렸다. 이에 관찰사 이 성중(李誠中), 어사 유대진(御史 兪大進)의 포계(褒啓)로 특히 옷감을 하사하고 예천군수(醴泉郡守)에 오르고 임진왜란 때는 초계군수(草溪군수)에서 예빈시 부정(禮賓시 副正)에 영전하니 도내 유생 정유(道內 儒生 鄭惟) 등의 상소로 다시 초계군수가 외었다. 이에 선생은 오로지 충의로서 일야 전수지계(戰守之計)를 세우고 장정의 훈련, 기계의 정비, 유적들을 잡는데 전력을 다하니 적이 감히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한다. 그후 병을 얻어 향년 63세로 졸하였다.

임진왜란때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선생의 마료로 있던 철성인 송암 이로(鐵城人 松巖 李魯)선생의 용사일기(龍蛇日記)에 말하기를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국토는 왜적에게 유린되고 백성들은 갈바를 찾지못하고 헤메이는 그 참상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선생은 나라를 위해 용약 창의(倡義)하여 역전하다 그해 5월에 초계가수(草溪假守:임시직 군수)로 있으면서 공사(公事)를 잘 다스렸으며 이끌고 있는 군사들은 물론 백성들까지 진군수(眞郡守)가 되어주기를 원하였고 김학봉 (金鶴峯)선생이 정호(鼎湖) 언저리에서 병력을 모을때 선생은 초계가수(草溪假守)로서 초계군사(草溪軍士)를 이끌고 출진하여 합류 대적할 때 별도로 초계(초계)의 정병 10 여명을 전송 하거를 이를 본 김학봉(金鶴峯)선생은 감탄하여 말 하기를 <그는 참으로 훌륭한 군수)로다. 스스로 정성스런 마음을 남의 마음 속에 옮겨 놓으니 사람 마음이 다 그와 같이 한다면 어떠한 일인들 치루워내지 못하리요>라고 하였다. 이와같이 선생은 국난에 창의(倡義)하여 용전하고 군사와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하였다.선생이 졸한 후 현풍 도동서원(玄風 道東書院) 별사(別祠)에 제향하고 있다.

참고문헌 : 한국의 족보, 국사대사전, 후손의 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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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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