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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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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법명-선종
활동시기
통일신라시대
본관
출생시기
시대
?~918 신라

상세설명

신라의 스님, 후고구려의 건국자, 태봉의 왕, 재위기간 901~918년. 성은 김(金), 법명은 선종(善宗), 신라 헌안왕(또는 경문왕)의 서자이다. 왕가에서 도망하여 숨어 살다가 세달사(世達寺)에서 스님이 되었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891년(진성여왕 5) 죽주(竹州)에 근거를 둔 기훤(箕萱)의 부하가 되었다. 다시 북원(北原), 양길(梁吉)에게로 옮겨갔으며, 894년(진성여왕 8) 명주(溟州 : 강릉)를 함락한 후 독립하여 장군을 자칭했다.

이듬 해 금성(金城) 등 10여 군현을 쳐서 강원도 일대를 장악, 송악(松嶽 : 개성)의 왕건(王健)을 철원의 태수(太守)로 임명했다. 898년(효공왕 2) 평안도와 한산주의 30여 성을 공략했으며, 899년(효공왕 3) 왕건을 보내 양길을 격파했고, 이듬해 국원(國原 : 충주), 청주 등을 함락했다. 901년 왕위에 올라 국호를 후고구려라 칭하고, 왕건에게 금성(金城 :나주)을 치게하여 견훤(甄萱)을 견제했다.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개정했다. 신라의 제도를 본떠 관직을 제정하고, 패강도(浿江道) 등 10여 주와 군을 예속했다. 다시 철원으로 수도를 옮긴 후 견훤의 군대와 여러 번 싸워 상주 등 30여 주와 군을 빼앗았다. 911년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고쳤다. 이후 세력이 확대되자 오만, 광포해져 부하와 백성의 신망을 잃었다 한다.

918년(정개 5) 왕건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도망하다가 부양(평강)에서 백성들에게 구타당해 숨을 거두었다. 그는 생전에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하고, 두 아들을 청광(靑光)보살, 신광(神光) 보살이라 불렀다. 또한 밖에 나갈 때는 비구승 2백 명에게 범패를 부르고 염불하며 뒤따르게 했다.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지었는데, 그 말이 요망하여 모두 경의 뜻에 어긋났다 한다. 그러나 그가 미륵불이라 자칭한 것은 미신적이기보다는 미륵신앙을 통하여 혼탁한 사회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그만큼 강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더욱이 두 아들을 지칭한 청광보살과 신광보살이 각각 관음보살과 아미타불을 가리키고 있어 그의 불교적 성격이 미륵불을 주존으로 하는 당시의 법상종(法相宗)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건의 혁명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가 사실 이상으로 미신적이고 폭군으로 기술된 듯한데, 5백년 고려 왕조를 거치면서. 더욱 평가절하 된 것으로 짐작된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사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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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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