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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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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한

백승/화포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1586년(선조 19년)
시대

상세설명

자는 백승, 호는 화포, 본관은 남양, 선조 19년 봉화읍 문단리 원구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의 선생은 재질이 뛰어나고 의기와 성품이 곧아서 잘못된 일을 보고는 참지 못하는 강직한 선비로 자라났다. 선생은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해인 인조 14년에 청나라 사신 용골대와 마대부 등을 우리나라에 보내어 모욕적인 조건을 제시한데 대하여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청나라 사신들의 목을 베고 전쟁도 사양하지 않겠다는 주전론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에서 우리나라는 청나라에 패하자 청태종에 의하여 전일 청나라와 화친하기를 가장 반대한 선생과 오일재, 윤집 등 세 학사는 소헌세자와 봉림대군, 많은 볼모와 함께 청의 심양으로 끌려 갔으며 그 곳에서 선생 등 삼학사는 끝내 처형당하고 말았다. 선생은 이렇게 일생을 마치기까지 오로지 나라를 지키는 마음이 지극하여 청나라의 서울에서 갖은 꾀임과 위험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우리 민족의 기백과 큰 뜻을 보이며 혼연히 죽어갔다. 이때 선생의 나이 51세(1586-1637)였다. 효종 3년에 양자간 아들 응원이 선생과 허씨부인을 의관장으로 평택의 경정리에서 장사지내고 그곳의 사람들이 현절사를 세웠다.

효종은 선생에 대한 은전으로 어머니 이씨부인에게 평생동안 살아갈 재산을 급여하면서 선생에게는 이조판서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또 숙종때에 이르러 다시 영의정으로 추서하고 충정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선생의 출생지인 봉화읍 문단리 원구마을에는 충렬비를 세웠으며 평양사우와 창열서원, 도동서원, 운천서원, 서산서원, 장암서원 등 전국에서 선생을 향사하여 왔다. 선생이 남긴 저서가 많았으나 병화로 대부분 없어지고 시부, 산문 등 약간과 항해록, 척화소, 서정록, 북행록 등이 화포문집에 엮어서 전하여 온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 한국인물사, 화포선생충렬비이전발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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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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