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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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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구

낙서/학암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선생은 진주(晉州) 강씨 진환(震煥:증 이조참판)의 아들로 1726년(영조 2년) 조마면 강곡리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낙서(洛瑞), 호(號)는 학암(鶴岩)이었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질을 타고나 배우기에 게으르지 않았으며 철없이 놀 나이에도 남다른 의기가 있었다 한다. 어릴 때 벗들과 산계곡에서 놀다가 산사태 난곳에서 사람의 해골을 발견했다. 남들은 놀라 사방으로 도망쳤는데 선생은 홀로 자기의 웃옷을 벗어 그 해골을 싸서 잘 묻어 주었다. "보통 아이가 아니다!" 라고들 그 의기와 대담함에 어른들도 감탄했다 한다. 자라서 영조때에 문과(文科)에 급제후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과) 승지(承旨) 등의 직을 거쳐 한성우윤(漢城右尹)에 올랐다가 귀향했다.

선생이 1788년(영조 12년)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채제공(蔡濟恭)이 반대파들의 무수한 공박을 당하다가 우의정(右議政)에 특진되자 모두 놀랐고 삼사(三司)에서도 다 그를 두려워하여 감히 바른 말을 못할 지경이었다. 이에 선생이 나아가, "오늘날 언관(言官:바른 말로 나랏일을 돕는 관리)이 모두 우상(右相)을 두려워하여 눈치만 봅니다." 하니, "바른말인 줄 알면서 나를 위해 바른말을 막을 생각은 없소."하였고, 임금께서 측근자에게 묻기를 새로 대간이 된 사람 중에 큰 인물이 누구냐 물으니, "진정 영남인 아모입니다."라고 이구동성으로 아뢰었으니 영남인은 바로 선생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1789년(영조 13년)에는 서원(書院)을 함부로 세워 백성에게 폐가 많음을 상소하다 귀양가 죽은 동부승지(同副承旨) 조덕린(趙德隣)을 위해 감히 죄풀어 줄 것을 상소하기도 하여 그 강직함을 보이기도 했다. 1796년(정조 20년) 임금이 재난 이변을 구제할 방책을 신하에게 묻자, 바른 학풍을 세워 풍속을 바로 잡을 것. 과거제의 폐단을 없애어 선비들이 공부하는 습성을 기르게 할 것, 바른말을 널리 들어 중의를 모을 것. 공론을 심음으로 붕당(黨派)을 없앨 것. 수령 방백의 백성 괴롭히는 일을 막을 것 등의 열 가지 상소를 올려 그 바르고 현실을 바로 본 충언에 임금도 크게 칭찬하고 힘쓰겠다고 답을 내렸다고 한다.

새 임금을 받들어 오로지 국가 민족의 앞날을 위해 바른 일이라면 일신의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충언(忠言)을 드리기에 서슴치 않았던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온 후 1810년(순조 10년)에 영면하니 임금께서 친히 제문(祭文)을 보내어 선생의 죽음을 애통해 하였으며 선생의 신위(神位)는 자동서원(紫東書院)에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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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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