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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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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여호

계숙/기재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진주(晉州)
출생시기
1620년(광해 12)
시대

상세설명

선생은 진주 강씨(晉州姜氏) 설(渫)의 아들로 1620년(광해 12년)에 조마면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계숙(啓淑)이요 호(號)는 기재(耆齋)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였고 침식을 잊을 정도로 학업에 열중하여 스승이자 삼종조(三從祖)인 복천(復泉)공은 후세까지 가문을 빛낼 아이라고 극히 사랑했다 한다. 선생은 1654년(효종 5년) 문과(文科) 급제 후 이조좌랑을 거쳐 육주군(六州郡)의 외직을 맡은 후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다.

지방관이 되어서는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주군민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는데 강진현감(康津縣監) 때는 백성의 소송을 공정하고 바르게 처리하여 현민을 덕으로써 교화시키니 현민이 감화되어 칭송이 노래처럼 자자했다 한다. 또한 횡성부사(橫城府使)때는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그 행장(行裝)에는 아무 물건이 없었고 은혜입은 주민들이 하루라도 제집에다 모시지 못함을 죄스럽게 생각했다 한다.

1679년(숙종 5년)에 장손(長孫) 결혼비용에 쓸 쌀 넉 섬을 변통해 달라고 집에서 전갈해 왔을 때, "사사로운 내집의 손자 결혼비용에 국비를 축낼 수 있으랴." 그저 웃고 말더라는 것이었다. 선생은 선정을 베풀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내직으로 임금을 모시고 있을 때<1675년경의 수찬(修撰).응교(應敎)>는 바른 말을 드리되 충성스럽고 솔직하게 드렸으며 아무리 극간(極諫:극한 발언)을 드려도 숙종대왕은 선생의 말을 옳게 여겨 정사를 돌보는 자료로 삼았다 한다.

선생은 근 삼십년을 관직에 있는 동안 검소. 절약. 애민정신에서 살았고 분수를 지키며 성심성의껏 임금을 도와 바른 정치를 다하도록 돌보는 이외에 자신의 명예나 지위를 위해 애쓴 적은 없었다. 효종.현종.숙종의 3대를 거치며 청백리(淸白吏)로서 바르고 깨끗하게 살다간 선생은, 1682년(숙종 8년)에 작고하여 묘소는 감천면 용호동에 있고 이헌경(李獻慶) 찬의 비가 섰으며 자동서원(紫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임란에 불탄 김산향교 중건을 선친이 미와한채 물려받아 이를 완성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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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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