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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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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언백

국필/제흥군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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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상세설명

성강서사(星綱書社)는 고언백 장군을 추모하고 제사 지내는 곳으로 영일군 기계면 화대동에 있다. 1851년 맨처음 준공될 때에는 기계면 성계동에 있었으나 대원군(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린 후 현지에 옮긴 것으로 현재의 성강서사의 건물은 고언백 장군의 12대 손이 1965년도에 세운 것으로 비(碑)는 1972년에 설립하였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때에 고언백 장군과 부장(副將)들의 행적을 적은 [난정세검록]이라는 책이 전해지고 있으며 경내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8작 지붕의 형태를 하여 동제 서제등이 있다.

고언백(高彦伯) 장군은 조선 중기의 무인으로 본관(本貫)은 제주이고 이름은 언백(彦伯) 자(字)는 국필(國弼)이라고 하였으며 호(號)는 제흥군(濟興君)이라 하였다. 그는 18살에 무과에 급제하여 처음 함경도의 수비를 맡은 북병사(北兵事) 장수가 되어 북방의 오랑캐들을 물리치는데 큰공을 세워 선공감주부(繕工監主簿)라는 벼슬로 승진되었다.

선조 25년 왜적의 대부대가 부산진에 상륙하여 동래성 좌수영 등을 차례로 점령할 때 경상도의 좌(左) 우(右) 병사들은 거의가 적의 풍문만 듣고 달아나기가 일수였다. 이때 고언백 장군은 순변사(巡邊使) 이일장군의 후임인 신립장군의 휘하에서 척후장(斥候將)이라는 직책을 맡아 있었으나 신립장군의 병졸들이 왜적들에게 처참히 참패를 당하였을 때 고언백 장군은 그 부대를 온전히 하여 후퇴하면서 중도에서 왜적의 머리 40여 두를 베었으며 자신도 많은 부상을 입었으나 부대를 정돈하여 그때 이미 한양을 버리고 피란한 임금의 뒤를 쫓아 평양에 이르러 복명하였다고 한다.

또한 선조 임금께서는 조방장(助防將)이라는 직책을 주어 임진강을 수비의 목표로 삼고 대탄지방(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영근면 전곡리)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임진강 수비선은 이에 앞서 방어가 뚫리어 왜적은 벌써 강을 건너 북진하였는데 임금은 아직도 모르고 방어에 임할 것을 발령하였던 것으로 그 명령은 실천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자 적병이 대동강의 동편에 이르자 임금은 다시 평양을 버리고 서북으로 향하였다.

고언백 장군은 평양수비의 총책임자인 좌의정 윤두수 도원수 김명원 평안도 순찰사 이원익의 명을 받아 장수 400여명으로 강을 건너 적진을 야간기습 공격하여 수백 명의 적을 쏘아 죽이고 적의 말을 300여 필이나 빼앗아왔다. 그해 임금께서는 승승장구하는 고장군에게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시키고 양주(楊洲)목사로 임명하여 능(陵)을 수호하도록 명령하시었다. 원래 양주에는 역대의 왕능이 가장 많았던 곳으로 조상의 묘를 지키라는 분부와도 같았다. 그는 장수들을 모집하여 산꼭대기의 험한 곳에 웅거하면서 때때로 나가 소수정예의 군사를 잘 이용하여 대부대를 맞아 미리 적을 쳐서 죽이고 능들 사이에 복병을 하였다가 적을 쏘아 죽였으므로 임금께서 공로를 높이 치하였으며 그 외의 임진왜란 시 고언백 장군의 전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만큼 많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고언백 장군은 사직하고 돌아가 노모를 봉양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다시 경기도 방어사에 명하였다. 그러나 또한 효성이 지극한 고언백 장군은 노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극구 사양하였으나 조정의 문신들이 난리를 치른 뒤에는 무인들이 교만하고 방자하여 어명을 거역하기를 고의적으로 하는 버릇이 생겼으니 고언백은 기념할만한 별 공적도 없이 정이품에 올라 분수에 넘쳐 마땅히 공손하고 부지런하여야겠는데 교만하고 제멋대로 임금님을 업신여기고 법을 무시한다 하여 간신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나 선조임금은 곧이듣지를 아니하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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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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