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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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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순

백유/경재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선생이 간신 윤 원형(尹元衡)에게 밉게 보여, 역모에 가담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심한 고문 끝에 옥중에서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도 너무나 청렴하고, 간관(諫官)으로서 바른 말을 잘했기 때문이었다. 경재 선생이 평소 얼마나 곧았던지, 탄수(灘 ) 이연경 (李延慶)선생이 충재(沖齋) 권벌(權 ) 선생에게 "곽백유(伯瑜)(곽선생의 자)는 그 곧기가 화살과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도 제자들에게 "곽순은 벼슬하기를 좋아 하지 않고, 어진 사람을 좋아하며, 착한 일을 하기 좋아하니, 만약 좋은 때를 만난다면 틀림없이 나라를 위하여 큰일을 해낼 것이다. "고 하였으며, 서천(舒川)군수로 있다가 다시 내직(內職)으로 옮길 때 '그처럼 다루기 어렵고, 사납다던 군민들이 그의 알뜰하다고 정성어린 치적에 감화되어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울면서 떠나는 길을 가로 막았다 한다.

또 을사년 5월에 병으로 관직을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갈 때. 행색(行色)이 하도 초라하여 평민과 다름이 없는지라. 유곡(幽谷)역의 역졸이 여관으로 들어가려는 선생의 말 앞을 가로막으면서 "사간 나으리의 행차가 곧 이를 참이니, 잡인(雜人)은 못 들어가오!" 하고 선생을 몰라볼 정도였다하니 그 검소함과 청렴함을 지금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은 혹심한 고문 끝에 마침내 옥사하고 말았다 .이를 애석하게 여긴 사관(史官)이 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던 것이다.
" 곽순은 남의 잘못을 바로 찔러 말하고 숨기지 않았다. 영남으로부터 체포되어 왔으나 수행(隨行)해 온 사람이 없고 또 음식을 제공하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 이틀에 다섯차례나 고문 받아 굶어서 죽었다." 그 후 선생을 경모한 사림(士林)들이 선생을 청통면의 송곡서원(松谷書院)에 배향(配享)하여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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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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