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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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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응척

두곡(杜谷)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안동
출생시기
1531
출생지
1531
시대
조선시대

상세설명

고응척(高應陟)은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12세에 후계 김범(後溪 金範)의 문하에 가서 중용을 배우고자 하니, 중용은 어린이가 배우는 글이 아니라 하므로 울면서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공부하며 한글로 교훈시(敎訓時) 70여 수를 지으니 모든 사람이 신기하게 여겨 신동이라 하며 장차 큰 문장이 되리라 하였다. 여기 한글 시조 한 수를 소개하면, "五倫을 생각하니 일가중에 셋이로다. 이 셋(부자, 장유, 부부)을 모르면 둘(군신, 붕우)을 어찌 아랴. 어째서 이제 선비는 사근(가까운 일을 버리고) 초원(먼 것을 취하는 뜻) 하나뇨" 어린 나이로 진사 시험에 합격한 후 1549년(명종 4년) 문과에 올라 각 고을의 현감과 강원 경상도 도사를 거쳐 성균관 사성에 이르렀으나, 벼슬에는 크게 관심이 없고 많은 글과 시를 쓰고 후배 교육에 전념하였다.

1591년(선조 24년)에는 임진왜란을 예고하여 나라에 상소를 올려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강조하였으나, 태평성대에 군비를 함을 옳지 않다 하고 그의 뜻을 알아 주지 않았다. 또한 조정에 벼슬하는 사람들이 나라 사랑에 앞서 개인의 영옥에만 눈이 어두워 당파 싸움만 일삼으니 이를 몹시 안타깝게 여겨 "임금과 신하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야 한다"고 글을 올리니 상감이 크게 칭찬하고 성균관 사성의 벼슬을 주었다. 선생은 정치보다 우리나라의 시문학과 역학(易學)에 남긴 업적이 크며 대학 개정장(大學 改正章), 안자서(顔子書), 인지편(人智編), 전인보감(銓人寶鑑), 신감집(神鑑集), 비은발휘(費隱發揮)와 시문(詩文) 등을 편찬하여 후세에 전하고 있다. 병석에 있을 때 아들이 약을 드리니, 받지 않고 "내 천수를 다하고 돌아가려 하니 무슨 유감이 있으랴"하고 돌아가니 선생의 나이 75세였다. 후생이 높은 덕을 추모하여 낙봉서원에 향사하고 있다.

참고문헌 : 선산군지, 인재 최현 이지은 행장, 전고대방, 한국인명대사전, 두곡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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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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