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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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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창

활동시기
삼국시대

상세설명

신라 무열왕(A. D. 660) 7월 9일, 황산벌에서는 3국통일을 위한 중대한 일전이 될 오늘을 위해 신라는 군사와 외교의 양면을 통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왔다. 신라의 대장군 김유신은 품일(品日)과 흠춘(欽春) 등의 장군을 거느리고 5만의 대군으로 황산벌에 진격해 온 것이다. 신라군은 오랜 전쟁에서 연마된 정병들이라 전쟁의 결과는 명백했으나 싸움은 예상을 뒤엎어 신라군의 전세는 아주 불리했다. 백제군의 공격을 너무나 용감했고 신라군은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여 이제는 기력도 다할 지경이 되었다.

계백장군은 전선에 나올 때 가족을 모아두고 결심을 털어놓으니 온 가족들은 기꺼이 그의 손에 죽기를 원했으므로 계백장군이 마음놓고 마지막 싸움터를 장식하도록 죽어갔다. 이러한 결사의 각오로 싸움터에 나온 계백장군의 백제군에 신라군이 당할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신라군 또한 이 황산벌의 싸움만은 절대로 패할 수 없었다.

좌장군 품일도 사태의 중대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어 아들 관창을 불러 세웠다. 품일장군은 이승에서 마지막이 될 아들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다 명령을 내렸다. 부친의 말을 들은 관창의 얼굴에는 굳은 결의가 피어올랐다. 품일장군도 사람이며 아버지이다. 자식에 대한 미련이, 사랑이, 왜 없겠는가. 가슴을 에이는 아픔을 삼키고 자식을 죽음의 장소로 내보내야만 했다.

아버지 앞을 물러나온 관창은 마음을 다지며 갑옷을 고쳐 입고 투구 끈을 졸라매었다. 이쪽은 백제의 진영, 한 차례의 격전이 지나간 뒤 양군은 잠깐 휴식상태에 들어갔다. 이 때 신라의 진영에서 한 용사가 단기로 창을 비껴들고 질풍처럼 달려들었다. 백제군에 뛰어든 그 용사는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창을 휘두르면서 싸우는 모습이 마치 신장(神將)과도 같다. 용감했던 백제군도 그 기세에 눌려 잠시 뒤로 물러서는 듯 했다. 그러나 아무리 용감해도 단 한 사람이다. 백제군은 겹겹히 애워싸고 몰아쳐서 드디어 사로 잡을 수가 있었다. 사로잡힌 신라의 용장은 계백장군 앞으로 끌려나갔다. 계백장군은 용감한 적장의 얼굴을 보려고 투구를 벗겼다. 그러나 계백장군은 깜짝 놀랐다. 용감무쌍한 신라의 장수는 아직 어린 티가 남아있는 홍안의 미소년이 아닌가! 옷은 찍겨지고 피까지 흘리면서 성난 눈동자를 크게 뜨고 계백장군을 노려보는 이 소년, 그러나 그 눈는 한없이 맑기만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계백장군은 탄식했다.

용장만이 용사를 알고 충신만이 충신을 사랑할줄 안다. 만고의 용장이요, 충신이기에 계백은 관창의 용기와 그 충성을 사랑했다. 살아서 돌아온 관창은 아버지 품일장군 앞에 나아가 사죄했다. 품일장군은 구사일생으로 범의 입 같은 적진에서 무사히 돌아온 아들을 보고 크게 꾸짖었다. 관창은 손으로 물을 움켜 마시고는 또 한 번 적진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시는 살아서 돌아가지 않을 결심을 한 관창의 활약은 참으로 놀라웠다. 그러나 어린 그의 힘에는 한계가 있었다. 창도 칼도 부러지고 말도 지쳤다. 힘이 다한 관창은 또 다시 사로잡히는 몸이 되었다. 계백장군은 방금 살려서 돌려보낸 소년임을 확인하고 간담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신라의 융성과 백제의 멸망을 눈앞에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이제는 하는 수 없이 관창의 목을 치고 그 머리를 말 안장에 메어달아 신라군으로 돌려 보냈다.

관창은 돌아왔다. 머리만 돌아왔다. 품일장군은 몸통없는 아들의 머리를 안고 흐르는 피를 옷깃에 적시면서 살아있는 아들을 대하듯 하는 것이었다. 아들의 죽음을 칭송하는 품일장군은 솟아오르는 뜨거운 눈물을 안으로 삼켰다.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신라군에는 큰 감격이 일어났다. 고요한 물결은 갑자기 파도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 물결은 순식간에 온 신라군을 덮쳤다.

신라의 대군은 마치 큰 홍수처럼 백제군을 덮쳤다. 고함소리, 말의 울음소리, 칼이 마주치는 소리, 비명소리, 피 무지개가 서고 때아닌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니 순식간에 황산벌은 지옥의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수에 있어서 너무나 뒤떨어진 백제군은 도저히 신라군의 적수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계백장군도 용감한 최후를 마쳤다. 백제의 최후를 장식한 가장 큰 싸움이었다.

황산벌의 싸움은 3국을 하나로 하기 위해서 넘어야 할 가장 험한 고비의 하나였다. 관창은 그 한 몸 바쳐 황산벌의 승리를 얻는 계기를 마련했으니 통일의 역정(歷程)에 가장 빛나는 이정표를 그 어린 손으로 세운 것이다. 통일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관창의 죽음이 또한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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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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