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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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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달수부부

통지/동계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안동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권달수의 자는 통지(通之), 호는 동계(桐溪), 본관은 안동(安東), 고려태사(高麗太師) 행(幸)의 후예이며 현감 임의 아들이다. 젊어서부터 학문이 뛰어 났고 당대에 유명한 선비들과 벗하였으니 대개 김일손(金馹孫), 이행(李荇), 박인로(朴仁老), 박중설(朴仲說), 정순(鄭淳)과 같은 이들이었다. 1492년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에 등용되고 1495년 독서당(讀書堂)에 뽑혀서 들어갔다. 정언(正言), 이조정랑(吏祚正郞)을 역임하고 외국에 가면서 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다녀 오기도 하였다. 북경에 다녀 온 후 교리(校理)가 되었다.

연산군 생모인 윤씨에세 시호를 내리는 것에 반대하여 귀양살이를 하다 사형을 당하고, 중종때 시호를 받아 1691년 임소서원(臨湖書院)에 제향하였다. 그의 부인은 그가 사형을 당할때 함창 고향 집에 있었다. 남편의 죽음을 알게 된 부인은 60 여일을 식음을 전페하고 빈소를 만들어 하루에 세 차례씩 상식을 지냈다.
"내가 지금 까지 살아 온 것은 남편의 시체가 고향에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 남편의 시체가 돌아왔으니 나는 함께 장사 지내라. 그리고 맏시동생 정랑(正郞)공의 아들을 남편의 후손으로 이어 달라."
이렇게 말하고 기진맥진하여 울다가 남편의 시체가 돌아오자 문 앞에서 영접한루 그 자리에서 남편의 뒤를 따라 숨졌다. 정묘년(1507년)에 경상감사 장 순손(張順孫)이 이사실을 듣고 중앙에 보고하였더니 중종 임금이 숙부인을 증직하고 정여(旌閭)를 명했다. 현재 상주시 이안면 중촌리 숭덕초등학교 앞 길가 동쪽 논 가운데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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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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