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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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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

원경/난곡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진주
출생시기
1538년(중종 23년)
시대

상세설명

자는 원경(遠卿)이오, 호는 난곡(蘭谷)이며, 본관은 진주(晋州)로 우의정 사상(士尙)의 아들이다. 1538년(중종 23년)에 태어나 1564년에 진사가 되고 1569년에 문과에 올라 심사를 거쳐 좌승지에 이르렀고, 1589년에 돌아가니 영의정을 증직했다. 당시 실력자 중 한 사람인 대사헌이 임금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인재를 천거하는 것은 마땅히 대사헌으로 하여금 겸직함이 옳다"고 하니, 강서가 말하기를 "대사헌은 탄핵을 주로 하는 관직으로, 또 사람을 천거하는 직책을 겸하게 하는 것은 권력을 가진 신분이 나무나 중(重)합니다. 불행하게도 간사한 사람이 이 직위에 있다가는 그 화가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하니, 듣는 자 모두가 옳다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으로 이조(吏曹)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는 일부러 세상사에 관심이 없고 멍청한 태도를 지어 피하니 이는 분수에 넘칠까 두려워 함이었다. 일찍부터 학문에만 전념하지 않았으나 정신이 맑고 명석하여 마음의 본바탕이 작은 일에 꺼리끼지 않고 도량이 넓으며 마음 씀씀이와 일을 행함에 있어 자연 의리가 있었고 어김이 없으며 굳고 곧으며 정당하였다. 또 엄숙하여 사람의 악함을 보면 원수와 갈이 미워 하였으나 사람의 잘잘못을 용서함에 있어서는 까다롭고 인색하지 않았다.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과는 거르침 없는 친구로 한번은 이원익과 옥당(玉堂)에 숙직할 때에 술을 마시고 흠뻑 취하여 크게 떠들고 웃으며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취하여 쓰러져서 인사(人事)를 차리지 못하였다. 때마침 임금에게 나아가 임금의 자문에 응하라는 명령이 내려 이원익이 서둘러 일으키어 임금의 앞에 나아갔는데 보통때와 같았으니 세상에 보기드문 호탕한 인물이었다.

그의 나이 지긋하여 임금을 모시고 눈물을 줄줄 흘리거늘 임금이 괴이히 여겨 물으니 [신이 목숨이 지극히 짧아 크게 한되는 바가 있사오니 부득이 전하를 오래 모시지 못하므로 자연 눈물이 나옵니다]하고 물러나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큰 난이 있을 것이나 감히 바로 말하지 못하겠도다]하더니 그 해 겨울에 정여립의 옥사가 일어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그 말이 모두 맞았다.

또 승문원에 있을 때 이원익을 가리켜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은 모두 이 사람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니 국가 위난한 때에 상위(相位)에 있어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일을 감당할 것이다]라 하여 앞을 내다 보았다. 길가에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고 한 아이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동중(動中)에 정(靜)이 있으니 훗날 귀한 사람이 될 것이다]하더니 그 아이가 곧 신흠(申欽)이었다.

그가 관직에 물러나 세상일 뜻이 없어 속세를 벗어났을 때 조정이 불안하여 서로 밀고 당기거늘 그는 두문(杜門)하여 자취를 감추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동서남북에 바람 불고 (東西南北風)
그 가운데 사람이 있네 (有人在其中)
크게 취하고 또 크게 취하여 (大醉復大醉)
화기가 스스로 밝고 밝도다 (和氣自融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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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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