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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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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안

사물/태촌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개성
출생시기
1553년(명종 8년)
시대

상세설명

본관은 개성(開城)이며 자는 사물(思物)이오, 호는 태촌(泰村)으로 퇴산(退山) 사원(士原)의 후손으로 1553년(명종 8년)에 문경군 영순면 왕태리(旺泰里)에서 태어났다.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농사에 힘쓰고 유명한 농가월령(農家月令)을 지은 분이다. 그는 7살에 백석(白石) 강제(姜霽)의 문하에 들어가 수업을 하였는데 하루는 선생이 강변에 흰 돌을 보고 백석천년백(白石千年白)이라 읊으니 그는 곧 장강만고장(長江萬古長)이라 답하니 선생이 크게 칭찬하며 말하기를 장차 반드시 나라를 빛내는 큰 문장가가 되리라 하였다 한다.

1573년(선조 6년)에 사마(司馬)에 올라 1576년 문과에 급제하고 성환도(成歡道) 찰방(察訪)으로 있다가 임기가 완료되어 1581년에 함창현감(咸昌縣監)으로 부임하여 함창앞 들의 넓은 평야를 위해 보(洑)를 설치하여 영구히 한해는 없애는 등 농사에 밝고 글에 능하여 농군을 가르치고 농사에 대한 농가월령(農家月令)을 지었다. 1582년(선조 15년) 좌랑(佐郞)에 올라 감찰(監察)로 있을 때 친상을 당하여 여묘(廬墓)를 하였고, 다시 감찰에서 정랑(正郞)으로 옮겼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창(咸昌)에서 토족들이 의병을 일으켜 그는 대장에 추대되었으나 그때 마침 예천군수(醴泉郡守)가 결원이 생겨 그는 군정을 섭행하라는 명명을 받고 예천으로 떠나니 의병은 곧 흩어졌다. 1594년 삼가현감(三嘉縣監)으로 통영(統營)의 충모공 이순신(李舜臣) 영(營)에 주시(主試)로 반달동안 가서 있기도 하였으며, 1598년 정유재란때 왜구가 다시 쳐들어 올때에는 우리의 방어 계획이 미비함을 알고 왜적을 막을 8가지 계책을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선생께 올렸다.

1606년 울산판관(蔚山判官)과 풍기군수(豊基郡守)를 거쳐 1609년(광해군 1년)에 벼슬을 버리고 남석정(南石亭 현재: 문경군 점촌읍 홍덕리 소재)에 돌아와 산수와 더불어 여생을 보내려 하였으나 1611년 광해군의 탁정이 날로 심하여지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북면 초동(山北面 草洞)으로 들어가 두칸짜리 집을 짓고 살다가 1623년(인조 1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영고사에 입향 하였으며 저서로 효빈록(孝嚬錄)과 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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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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