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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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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

면경/동고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진주(晋州)
출생시기
1544년(중종 39년)
시대

상세설명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자는 면경(勉卿)이고 호는 동고(東皐)로 우의정을 지낸 사상(士尙)의 아들이며, 승지 서(緖)의 아우로 1544년(중종 39년)에 출생하였다. 그는 1567년(명종 22년)에 진사에 합격하여 1577년(선조 10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삼사(三司), 이랑(吏郞), 검상(檢詳), 전한(典翰) 부제학(副提學) 믹 병조(兵曹),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나 판중추(判中樞)에 이르렀다. 춘추가 높은 임금이나 일흔살이 넘은 정이품 이상의 문관(文官)이 들어가 예우를 받는 곳인 기사(耆社)에 들어갔고 평난(平亂), 호성(扈聖) 두훈으로 진흥군(晋興君)에 책봉되었다.

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난(亂)때 문사랑(問事郞)으로 대궐에 들어가니 그때 조정의 이름난 신하가 모두 평소에 정여립 일당과 서로 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그와 이항복(李恒福)과 몇 사람만이 적과 전혀 관련이 없었으므로 칭찬이 자자 하였다. 임진왜란 때 어머니 상을 당하여 슬퍼하고 있는데 임금이 탄 수레가 서순(西巡)하여 송경(松京 : 開城)에 이르러 그를 관동백(關東伯)에 특배 하였으므로 부득이 명령을 받들어 경기의 여러 장수와 합력하여 춘천·원주 등지의 적을 격멸하여 많은 공을 세웠고 1593년 봄에 적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이 관북에서 돌아감으로 그는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적과 싸워서 많은 공을 세웠으며 그해 여름 평해(平海)에서 적을 많이 잡은 공으로 가선(嘉善)에 올랐다.

선조가 정력을 다하여 국치(國治)를 도모할제 경연에서 왕을 모시는데 옥당(玉堂)의 모든 신하들이 잠시 물러가 쉬어도 의관은 감히 끌지 못하였다. 월랑(月廊)이 잦고 소퇴(小退)하여도 곧 임금 앞에 나아가 강론을 계속함이었다. 어느날 밤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술을 먹는데 주량이 차도록 마시게 하니 그는 술을 잘 마시는 지라, 내시(內侍)가 촛불 아래서 잔을 다 비우지 않았으니 퇴배(退杯)를 못한다고 할 때 그는 취하여 잔을 뒤집어 보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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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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