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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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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

인경/시암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진주
출생시기
1555년(명종 10년)
시대

상세설명

본관은 진주(晋州)이고, 자는 인경(仁卿)이며 호는 시암(是庵)으로 우의정을 지낸 사상(士尙)의 아들로 1555년(명종 10년)에 태어났다. 그는 일찍 맏형인 서(緖)가 지감이 있었는데 여러 동생의 장점을 말할 때 인(絪)은 마음이 차분하고 조용하며 재능과 기량이 있으니 늦게 입신출세(立身出世)하리라 하였다.

그는 뒤에 천거되어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제수되어 여섯 고을을 역전하였으며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 때에 호성(扈聖)훈으로 진창군(晋昌君)에 책봉되어 우윤(右尹)에 이르렀다. 이이첨(李爾瞻)이 정치를 어지럽게 할 때에 그는 서울에 사는게 싫어져 금산(衿山)의 선산(先山) 아래로 물러나 경서와 사기를 벗하여 즐기며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다.

또 광해군이 시골에 있는 관리에게도 따로이 폐모(廢母)에 관하여 의견을 물을 때 그는 "사람의 떳떳한 도리에 처하여 지당한 태도로 힘써서 조그만치의 미진함도 없어야 한다"고 임금께 의견을 올렸으며 그때 대비(大妃)가 서궁에 유폐(幽閉)되어 있어 퇴직된 사람은 감히 가서 보지도 못하였으나 그는 홀로 찾아 뵙고 생신일과 명절 때 문안도 빠짐없이 드리더니 대비가 아름답게 여겨 인조반정 후 인조에게 여러번 그의 사람됨을 말하였다.

또 인조께서 경연에서 주역(周易)을 강(講)하려 할 때 문장공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역학에 깊기를 강인보다 나은 이는 없다]하여 그를 특진관(特進官)으로 당당히 입시케 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임금이 강화로 피신할 때 임금을 호종(扈從)하였고 다시 통화사(通和使)로 평산(平山) 적진에 가는데 철갑을 입은 기병이 충만하고 칼과 창이 삼엄하게 둘러져 있었으나 그는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고 팔십 노령에 긴 수염을 날리며 위엄을 보이니 적도 공경하고 화의를 맺는데 명(明) 나라의 연호를 버리고 금(金) 나라의 정삭(正朔)을 받더라 하였으나 그는 대답하기를 [우리나라가 명나라를 친히 섬겨온지 3백년이며 또 임진왜란에 구원의 은혜가 있거늘 어찌 우리가 은의(恩義)를 배반 하리오]하며 의리로써 명나라를 배반할 수 없다고 하니 적도 따르고 그를 조선노대관(朝鮮老大官)이라 일컬으며 그들도 극히 존칭하여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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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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