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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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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조

활동시기
조선시대

상세설명

옛날에는 지주들이 많은 농토를 독점하여 소유하면서 소작인을 두어 경작(耕作)케하고 가을이 되면 소작료를 매겨 지주에게 갖다 바치도록 하였는데 소작인에 대한 지주의 위세가 당당하여 일년간 지은 농사를 가히 송두리째 뺏아가는 착취 행위를 예사로 하였다. 그런데 몸소 자수성가(自手成家)하여 많은 농토를 일구어 농토 없는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끼니를 못 잇는 이웃을 구휼(救恤)한 착하고 어진 지주가 있어 후인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 미담(美談)이 있다.

1874년 소보면 신계동에서 태어난 능성(綾城) 구씨인 구경조(具慶祖)는 기울어져가고 있는 가세(家勢)를 중흥시키는데 온갖 힘을 다하여 몸이 돌가루가 되도록 노력하여 한 마지기, 두 마지기씩 사 들인 농토가 그 당시로 봐서는 흔치 않은 지주 행세를 할 정도로 불어났다. 그러나 스스로 가난의 서러움을 겪어본 구경조씨는 땅 없는 사람들의 괴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지라 지주(地主)라는 행세는 조금도 나타내지 않고 어렵게 모은 농토를 가난한 이웃 농부들에게 나누어주고, 소작료는 농사를 지은 소작인이 갖다 주는 대로 받을 뿐 아니라 농사가 적어 끼니를 잇지 못하는 농민들에게는 직접 둘러보며 소작료를 탕감해 주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자기 집에 서당을 차려 훈장(訓長)을 모셔 놓고 마을의 어린이들에게 한학(漢學)을 익히게 하며 글을 모르는 가난한 사람들을 가르치고 깨우치는데도 부지런하였다. 비록 그 자신은 크게 배우지 못하고 두메 산골에 살고 있더라도 가난하여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는, 배우지 못하는, 장님과 같은 젊은이들을 내 가족처럼 어려움을 구제해 주고 글눈을 뜨게 해 주었으니, 어찌 세상 사람들이 감동하지 아니 했으리요.

그의 나이 50세가 되던 1923년 12월에 지역 주민들이 그의 공을 기리고 덕을 숭상하며 길이 후손에게 전하기 위하여 그가 살던 마을 앞에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오늘에 전하고 있다. 가난한 이웃을 도우며 이름 없이 살다가 조국 광복의 빛도 보지 못하고 1934년 향년 60세로 세상을 떠나니 모든 마을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을 뿐 아니라 지금도 그의 넓고 깊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그의 정신을 이어 받아 협동 단결하여 잘 살아보자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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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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